본문 바로가기
자유주제 글쓰기

오징어 게임 사례로 본 문화예술의 좌파본능

by 독거성자 2021. 10. 16.
반응형

티비 드라마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운 오징어 게임

서양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이성을 꼬실때 쓴다고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라면먹고 갈래?'에 해당하는 말이 '우리 집에 가서 넷플릭스 볼래?' 라고 한다. 그만큼 넷플릭스가 저변이 넓다는 방증이다. 이런 넷플릭스에서 한국어로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든 드라마가 비영어권 드라마로는 세계 최초로 넷플릭스 가입국가 최다 시청을 했고 심지어 넷플릭스 사상 최고 시청률을 보인 영어 드라마 브리저튼을 완벽하게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할 대기록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시즌2는 전혀 계획이 없으며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던 감독이 시즌2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하게 만들 정도로 넷플릭스가 저작권을 가지는 한국어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공전의 대히트를 했다. 앞으로도 오징어게임이 세운 기록은 상당한 기간 동안 깨지기 힘든 대기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오징어게임 속 VIP의 모델은 트럼프라고 인정한 황동혁 감독

황동혁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오징어게임 작중 VIP가 트럼프에서 영감받았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유력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러한 황감독의 발언을 보도하고 매스미디어들이 일반대중들보다 오히려 더 흥분해서 연일 보도를 쏟아붓고 있다. 마치 이런 작품을 기다려왔다는듯이 일개 드라마에 대해서 매스미디어들이 과도한 관심을 퍼부어대는 것을 보면서 어느 국뽕 유투버말대로 한국만 쏙 빼놓고 세계가 한국을 놀리려고 몰래카메라를 찍는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한국인 입장에서는 신파에 불과한 그저 데스게임 장르물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전세계적 히트를 그것도 다시는 세우기 어려운 대히트를 해버렸으니 그야말로 얼떨떨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언론은 왜 이토록 오징어게임에 대해 일반대중보다 더 관심을 집중하는걸까?

 

언론의 본업은 사회비판

일단 브리저튼 같은 지극히 서양적인 시대극은 아무리 훌륭해도 기본적으로 서양인들만의 이야기다. 한국이나 동양권에서는 피부로 와닿기 힘든 이질적 소재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은 한국적인 소재를 쓰면서도 그 바닥에는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의식을 깔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전세계적 공감을 일으키는 보편성이다. 말하자면 오징어게임은 현재의 중년성인들이 국민학생 시절 아이들 놀이를 하는 특수한 소재를 끌어다가 빈익빈부익부를 풍자하는 전세계적 보편적 주제에 덧씌운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전세계인들에게 특수성으로는 호기심을 보편성으로는 공감을 일으켜 폭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론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은 것이다. 언론의 업은 세상에 대한 비판에 있다. 어느 특정 시대, 특정 문화에 대한 이야기라면 굳이 언론이 연일 대서특필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공통관심사인 빈부갈등이라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할일이 많아지는게 언론의 근본인 것이다. 이렇듯 언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서는 할 일이 없는 업종이다. 뭔가 이 세상에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지적해야 먹고사는게 언론이요 매스미디어인 것이다. 

문화예술가들은 좌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런데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언론인들만의 갖는것이 아니다. 문화예술 역시 이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왜? 만약 이 세상이 문제가 없고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문화예술가들의 상당수가 할 일이 없어진다. 상상해보라. 이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모두가 열심히 살다보면 잘먹고 잘살수 있다면 구태여 뭐하러 그런 골치아픈 사회비판을 애써 하겠는가? 실제로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인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예술가들은 현상을 있는그대로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 그 뿌리에 뭔가 더 엄청난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을 하고 그것을 창작으로 끄집어내려 한다. 물론 모든 문화예술가들이 이렇게 사회비판적이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창작적으로 할 일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문화예술직 종사자들은 필연적으로 좌파가 될 수밖에 없다. 빈부격차, 경제불평등에 대해 그 배후에 엄청난 악의 세력이 있다고 상상을 할 때 풍부한 이야기거리가 나올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게 되는 것이 문화창작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만약 우파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로 돌아간다면 영웅 만들기에 급급할 것이다. 실제로 4전5기의 신화 홍수환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치하를 받기도 했던만큼 스포츠 스타들은 국가적으로 애용되었다. 그때가 어쩌면 우파들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 좌파들은 숨죽여왔다. 그시절에 문화예술가들은 우선 시장의 크기가 성숙하지 못했기에 지금처럼 융성하지도 못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부갈등이 커지며 그에 비례해서 문화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의 폭과 범위도 같이 크고 넓어져왔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은 이 세상은 뒤엎어야할 문제 투성이며 각종 음모와 악의 세력이 판치는 뒤엎어버려야 할 세상이라는 생각이 문화예술가들에게 공유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사회분위기인 것이다.

어느 우파유투버의 오징어게임 평가절하

그래서 어느 우파유투버가 오징어게임을 힐난하는 목소리를 듣고 참 씁쓸해졌다. 과거 좌빨에 선동되었다가 전향한 우파로서 나 자신이 아직도 진정한 우파가 아닌걸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오징어게임도 황동혁 감독도 아무 문제 없으며 오징어게임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좌파에게 진 우파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좌빨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난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경쟁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못사는 공산주의보다는 경쟁을 통해 불평등하게 잘사는 자본주의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며 그 두가지를 섞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은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그런 전례가 없으며 그 두 체제를 섞으려고 하는 새끼들중의 대가리들은 친중,친북 빨갱이들과 친한 개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좌파는 엄존한다. 좌빨이 문제일 뿐

흔히 예체능이라고 해서 체육과 예술을 한데 묶어부르는데 정치적으로 보자면 체육은 우파에게 선호받고 예술은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다. 양자가 성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체육은 그 과정이 매운 단순명쾌하다. 육체를 혹독하게 단련하여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리한 자가 부와 명예를 얻는 비교적 단순한 직업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체육처럼 단순명쾌한 방법론이 따로 없다. 어느 한가지 육체적 기능만으로 돈과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여러가지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체육처럼 단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육체로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체육은 근면성실을 모토로 하는 우파들에게 환영받는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 사례로 체육 스타들이 중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예술은 성공의 잣대가 분명하지 않고 소비대중들의 기호에 따라 그때그때 변화하기 때문에 이렇다할 평가기준이 없다. 근면성실도 문화예술과는 생리적으로 결이 다르다. 문화예술은 창작성과 재미가 중요한 것이지 부지런히 육체를 갈고 닦는 방법론과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문화예술은 우파보다는 이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좌파와 결이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오징어게임을 체제비판으로 해석하면 좌빨영화로 보일 것이지만 인간의 탐욕과 원래부터 세상에 일반적인 빈부격차에 대한 자연스러운 문제제기로 보면 매우 건전한 사회비판 영화가 되는 것이다. 비판이 없으면 언론도 문화예술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가 단순하고 간단한 육체노동만 하는 원시공산 사회라면 애시당초 좌파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빈부격차는 개인의 자유와 함께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며 그러한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사상의 자유다. 그래서 문화예술 좌파는 어느 사회나 엄존한다. 문제는 문화예술의 좌파가 아니라 정치적 좌빨이다. 좌파는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만 좌빨은 그 문제해결방법을 공산독재주의, 전체주의사회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건전한 좌파는 비판은 하되 체제 자체를 뒤엎지는 않는 반면 좌빨은 공산독재와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북한과 친하다. 자기는 부동산으로 떼돈을 벌면서 국민들에게는 1인 1주택만 가지도록 법을 바꾸는게 좌빨들이다. 빈부갈등을 지적하는 문화예술의 건전한 본업과 빈부갈등을 조장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정치적 좌빨행위를 똑같이 보면 참 곤란하다.

오징어 게임의 초대박을 보면서 왜 우파들이 좌파들에게 졌는가를 곱씹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좌빨들은 배운게 친중,친북이라 개노답이다. 그러나 문화적 좌파들은(물론 그중에 좌빨도 많다) 자기 본업에 충실한 것 뿐이다. 사회비판을 체제전복으로 몰아부쳐 평가절하하는 것은 억지다. 비판은 언론과 문화예술의 본업이며 그들은 자기들이 할일을 할 뿐이다. 그들의 그런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전에 다른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지 못한 우파들의 능력부족을 반성하는게 어떨까? 문화좌파들은 사상이야 어찌됐건 좌우지간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대중 소비자들에게 재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해왔다. 반면 문화우파들은 우선 그 쪽수도 적을뿐더러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 히트시켜야 할지 알려진 바가 내가 알기로는 많지 않다. 이 세상에 대한 복잡하고 치열한 해석은 늘 좌파들이 해왔다. 좌파라는 자체가 그렇게 세상을 해석하지 우파들은 정치,종교에 빠져서 세상에 대한 복잡하고 치열한 해석을 내놓지 않은 결과 실력으로 밀려난 것이라고 보는게 정직한 시각이 아닐까 싶다.

비판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와 좌빨은 일도양단할 수 없다. 비판이 중심을 잃으면 비난이 된다. 이성적 비판이 감정적 비난이 되는 것은 방구가 잦으면 똥이 나오는 이치다. 그만큼 어디까지가 건전한 비판이고 어디서부터가 체제전복의 위험한 사상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으며 창작자의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다만 그 결과물을 가지고 판단할 뿐이다. 그렇게 볼때 오징어게임은 체제전복을 통해 공산독재, 전체주의로 회귀하려는 위험한 사상을 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단지 전세계에 만연한 빈부격차에 대한, 인간의 탐욕에 대한 매우 건전한 비판을 창작적으로 잘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것은 좌,우파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인 영화상의 VIP, 현실에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로 불리는 소위 빅브라더이 존재한다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아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 좌빨도 우빨도 소위 빅브라더들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는 지적 또한 무시못할 설득력과 방증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좌파나 우파는 어느정도 그 행동패턴이 예상되지만 좌우파를 넘나들며 돈과 권력으로 조종하는 빅브라더들의 세계는 범점하지 못할 초월적 영역이기에 그 무엇도 예측할 수도 방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방관할 뿐이다.

다만 참으로 약이 오르는 것은 빅브라더들이 자기들은 우파적으로 돈벌고 우파적으로 살면서 세상은 좌빨식으로 통치하려 든다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에서도 빚에 시달리는 인생들의 죽음을 놀잇거리로 즐기듯이 빅브라더들은 좌와 우의 싸움을 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식,중국식 전체주의 세상이 도래할지 자유민주주가 다시 승리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양자의 어정쩡한 섞임 또한 이미 자본주의의 돈맛을 본 한국인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모두 빅브라더들이 놀리는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한 것일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