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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지식

이야기 고사성어 89 흥망성쇠/부복납간/전무후무/유전무죄 무전유죄

by 독거성자 202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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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    亡    盛    衰

일어날 흥  망할 망   성할 성   쇠할 쇠

흥망성쇠: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그리스 제국,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몽골 제국 등 일찍이 역사에서 세력을 떨쳤던 대제국들은 다 쇠퇴의 과정을 거쳤고, 문명을 싹 틔웠던 곳들이 지금까지 찬연함을 유지하며 남아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 나라뿐일까? 세상일은 모두 돌고 돌아 순환되는 이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盛者必衰, 번성한 후에는 반드시 쇠퇴하는 법이고, 興盡悲來,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슳픈 일이 닥쳐온다고 했다. 또 極盛이면 必敗란 말도 있다. 무슨 일이나 극도로 성하게 되면 또한 반드시 그 끝은 좋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剖    腹    納    肝

쪼갤 부  배 복    들일 납     간 간

부복납간: 배를 가르고 간을 넣는다: 처절한 충심

 

춘추 시대 衛나라 때 일이다. 衛 19대 임금인 위의공은 空前絶後의 鶴애호가였다. 

위 의공은 궁궐에 거대한 새장을 짓고 수집한 학을 거기 모아서 길렀으며 그 학들에게 벼슬[3]을 내리고 국고를 기울여 수입 곡물을 사먹이는 희대의 뻘짓을 했다. 사실 곡물만 먹이는 것도 육식성에 가까운 학의 건강상 좋지 않다는 것도 아이러니.

이 때문에 나라 안팎의 불만을 산 나머지 적인(狄人)[4]이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병사들은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 라고 하며 조롱할 정도였다.

이에 학들을 풀어주고 몸소 방어전을 지휘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박살나고 본인도 피떡이 되도록 칼로 난도질되어 끔살당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였는데 타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대부 굉연(宏演)이 나중에 전쟁터에서 주군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은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 멸망 직전의 위기라 장사를 지낼 사람과 도구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굉연은 스스로 할복하고 자신의 몸을 관 삼아 그 간을 담고는 순절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부복납간(剖腹納肝)이다.

 

 

前    無    後    無

앞 전   없을 무    뒤 후    없을 무

전무후무: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는 매우 드문 일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인데, 중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前無古人,後無來者라는 풀버전을 더 많이 쓴다. 청나라 때 소설가 이여진의 '경화록'이라는 소설에 나온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시절에 주원장의 개국을 도운 공신 유기(劉基)[1]는 평소 "옛적 제갈량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촉땅 만을 움켜쥔 채로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나는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내가 제갈량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며 자주 제갈량을 폄하하였다. 이후 유기가 벼슬을 내려놓고 중국을 유람하던 도중 옛 촉한 지역인 성도 주변으로 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어느 절에 묵게 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었는데 스님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절간에 웬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가와는 거리가 먼 고적한 산중의 절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궁금증을 품은 유기가 주지스님에게 "웬 절간에 닭울음 소리입니까?"라고 묻자 주지스님이 대답하기를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하루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을 한 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녘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내어 아침을 알려줍니다."[2]라 대답하였다. 이에 평소 제갈량을 무시하던 유기가 "그러면 나도 한 마리 빚어주겠소."라고 말하고 흙으로 닭을 빚자 유기가 빚은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이에 화가 난 유기가 제갈량이 빚은 닭을 던져서 깨자 닭 안에서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 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에 유기는 짐짓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절을 나와 성도로 향했다. 이로써 유기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으나 역시 제갈량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성도에 도착한 유기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지나게 되었는데 무후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가고 걸어 지나가는 자들도 두 손을 공손히 하여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심히 보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자신이 제갈량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하마비 앞에 다다르자 말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기는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도 말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땅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때를 만나면 하늘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계책이라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그리하여 유기는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제갈량에게 사죄하고자 제갈량의 사당으로 찾아갔으나 풍수지리적으로 아무리 보나 그다지 터가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이에 유기가 "제갈 선생님께서는 다른 것은 모두 잘하셨으나 풍수는 잘 보지 못하셨구나."라고 생각하고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유기 자신의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에 놀란 유기가 좌우를 시켜 자신 무릎 아래의 땅을 파게 시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충신(忠臣)은 죽어서도 주군(主君)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

이에 유기는 긴 탄식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갈무후 같으신 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


위의 내용은 비록 전설이나, 중국인들과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제갈량을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이 전무후무 제갈무후에서 떼어낸 '전무후무' 란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무후무를 쓰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의미로 공전절후空前絶後를 흔히 쓴다.

중국은 空前绝后, 前所未有 로 쓴다.

 

有  錢  無  罪  無  錢  有  罪

있을 유 돈 전 없을 무 죄 죄   없을 무  돈 전  있을 유  죄 죄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있으면 죄가 없다: 돈으로 법을 살 수 있다는 뜻

 

1988년 잡범이었던 지강헌이 했던 유명한 말이다.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 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 시내로 잠입했다. 그 중에 지강헌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본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인데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하지만 72억 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겨우 7년 선고에 그마저도 2년 만에 풀려난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 인질극을 벌이면서 해당 발언을 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우리 법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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